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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자연현상에서 숫자 추출…이게 다 암호 재료입니다 [Science]

이새봄 기자

입력 : 
2022-02-18 17:11:09
수정 : 
2022-02-18 21: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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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 `진성난수`의 세계

암호에 쓰이는 규칙 없는 수 `난수`
보안시스템의 핵심 요소로 쓰여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생성한 난수
공식대로 만들어내 해커의 표적

소금결정·유전자 구조·라바램프…
완벽한 무질서로 암호 만들어
해킹 원천차단하려는 노력 계속
사진설명
소금 결정과 DNA 데이터, 라바램프가 움직이는 모양 등의 자연현상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무작위 수인 '진성난수'를 만드는 데 쓰인다.
기름과 물, 밀랍이 섞여 마치 용암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형형색색의 램프. 신비로운 느낌 때문에 침실이나 분위기 있는 칵테일 바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이 '라바램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내 한 기업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라바램프 100개가 모여 있는 '엔트로피의 벽'이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이버 보안·인프라스트럭처 서비스 제공 업체인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 사옥 로비에 위치해 있다. 실제 이 회사의 상징과 같은 엔트로피의 벽은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가장 중요한 '보안'을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방패다. 이 아름다운 방패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수, 즉 난수를 만드는 데 활용된다. 램프에 채워진 밀랍과 기름은 램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소용돌이는 매번 다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다. 라바램프 100개 중 단 하나도 동일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회사 로비 천장에 붙어 있는 고해상도 카메라는 정기적으로 램프의 사진을 찍어 회사 서버에 이 이미지를 보낸다. 매번 다른 디지털 이미지는 컴퓨터에 의해 일련의 숫자로 저장된다. 디지털 사진의 픽셀마다 고유한 숫자값이 있고, 이 숫자는 회사 서버가 보안 암호키를 만드는 시작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난수 문자열이 된다.

난수는 주기도 없고 규칙도 없는 '무작위의 수', 즉 예측이 불가능한 수다. 일례로 1, 3, 5, 7이라는 수가 나열돼 있으면 다음 숫자가 9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난수는 규칙성이 없기 때문에 앞에 나열된 수를 토대로 뒷자리 수를 예측할 수 없다. 이 난수는 모든 암호보안 시스템의 핵심 요소다. 컴퓨터와 이동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를 암호화하는 데 쓰인다. 통신 내용을 전송할 때 암호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나 통화 내용을 도청할 수 있다. 컴퓨터로 웹 서핑을 할 때도 암호보안 시스템이 없다면 쉽게 개인 기록이 확인된다. 온라인 뱅킹과 카드 결제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개인정보를 보호해주는 암호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확실한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가장 불확실한 숫자, '난수'인 셈이다.

초기에는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난수를 만들었다. 사람이 판단하기에는 무작위로 보여 난수로 취급을 하지만 정해진 알고리즘으로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난수라고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가 만든 난수는 '난수를 흉내 낸 수', 즉 의사난수라고 불린다. 이러한 난수는 알고리즘만 파악하면 난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일례로 최초로 컴퓨터를 활용해 난수를 만든 미국의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은 무작위 수를 만들기 위해 '중앙제곱법'이라는 알고리즘을 썼다. 난수를 계속 만들어 내기 위한 씨앗, 즉 '시드(Seed)'라고 불리는 임의의 수를 제곱하고, 제곱해 나온 수 일부분을 또 제곱하며 난수를 얻는다.

이 의사난수들은 겉보기엔 난수이지만 사실은 법칙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법칙을 누군가가 파악할 경우에는 방어벽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사진설명
이 때문에 사람들은 완벽한 무질서를 찾기 위해 자연으로 눈을 돌렸다. 자연에는 어떠한 훌륭한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자연이 가진 불확실성 때문이다. 이를 숫자로 변환해 적용한다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진성난수'를 만들수 있다. 클라우드플레어의 라바램프를 통해 만들어지는 난수 역시 진성난수다. 대중에게 무료로 난수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인 랜덤오알지는 대기에서 발생하는 잡음을 활용해 난수를 만든다. 2020년 2월 영국 에든버러대 연구진은 황산구리 결정이 생성되는 과정을 이용한 난수 생성기를 개발해 국제 과학저널 '물질(Matter)'에 공개했다. 우리가 보는 대다수 고체물질은 원자가 규칙적으로 모여진 결정으로 구성돼 있다. 물질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원자들이 모여 핵을 생성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이 핵 생성 과정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같은 농도, 같은 양의 용액이 담겨 있는 그릇이라도 결정이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할지는 알 수가 없다. 즉 결정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예측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무한대인 셈이다. 연구진은 총 100개의 바이알(실험용 유리병)에 황산구리 용액을 담고 10분 간격으로 각 바이알의 사진을 찍었다. 어느 정도 결정이 적당히 형성됐을 때 촬영한 사진을 통해 결정들의 크기와 방향, 색 등 분류 기준에 따라 각자의 값을 부여하고, 이를 결정이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나열했다. 향후 결정 생성 속도를 높인다면 난수를 만드는 속도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기대했다.

KAIST는 지난해 8월 반도체의 확률적 거동을 이용한 진성난수 개발에 성공했다. 연구소는 진성난수를 추출하기 위해 모트 전이 소재에 주목했다. 모트 전이 소재는 특정한 온도에서 전기 전도도가 부도체에서 도체로 이동하는 전이 소재다. 이 소재에 전류를 흘려 가열하면 부도체 상태와 도체 상태가 주기적으로 변하면서 생기는 진동을 발견할 수 있다.연구팀은 이 과정에서 주기적으로 모트 소재의 가열과 냉각이 반복될 때 열의 생성과 발산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입증했다. 또한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특성을 진성난수로 변환해주는 반도체칩 형태의 진성난수 생성기를 설계·제작해 진성난수를 성공적으로 수집했다. 기존 전자기기와 호환도 가능해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보안을 위한 암호화 하드웨어로도 활용할 수 있을 예정이다.

이외에도 박테리아가 성장하고 증식하는 방법이나 DNA 시퀀싱 데이터로 난수를 만드는 시도도 있다. 우주배경복사(CMB)에서도 난수를 생성한다.

사진설명
다양한 진성난수 생성 방식 중 특히 난수를 생성할 자연의 재료로 '양자'를 선택한 것이 양자난수다. 양자역학적 성질을 활용한 양자난수 생성 방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빛의 무작위성을 이용한 방식과 방사성동위원소의 자연 붕괴 현상을 이용한 방식이다. 빛을 이용해 난수를 만들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빛의 알갱이인 광자를 편광판에 통과시키는 것이다. 편광판은 사진기 셔터처럼 원하는 방향의 빛만 골라서 투과시키기 때문에 '디지털 셔터'라고 불린다. 광자 중 편광판을 투과할 수 있는 진동 방향으로 움직이는 광자는 판을 통과하고, 다른 입자는 반사된다. 이때 빛이 통과하면 1, 반사되면 0으로 숫자를 기록한다. 광자는 양자역학에 따라 확률적으로 무작위로 검출된다. 연달아 광자를 통과시켜 나오는 숫자는 '1010100'과 같은 식으로 나열되는데 이 숫자를 예측하는 건 양자역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성된 순수 난수는 무작위성뿐만이 아니라 난수의 분포도 균등하다.

2020년 SK텔레콤과 삼성전자가 협력해 출시한 스마트폰에도 양자난수를 생성하는 칩셋이 탑재됐다. 이 휴대폰은 양자난수를 통해 일부 개인정보의 이중 보안이 가능하다. LED 광원부가 빛(양자)을 방출하고, 이 빛을 CMOS 이미지센서가 감지해서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난수를 생성하는 방식이다.

방사성동위원소를 통해서도 양자난수를 만들 수 있다. 방사성동위원소는 자연에서 저절로 붕괴되면서 입자를 방출하는데, 입자가 방출되는 시간이 무작위다. 동위원소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숫자로 전환해 초소형 난수를 만들 수 있다. 지난해 9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공동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방사성동위원소인 니켈-63 베타선으로부터 난수를 생성하는 핵심 회로를 집적화해 작은 칩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베타선은 에너지가 작기 때문에 방사선 검출 센서에 영향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사용할 수 있어 난수를 고속으로 생성할 수 있다.베타선은 투과성이 없고 얇은 플라스틱으로 차폐되므로 안전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지금까지는 소형화한 검출 센서와 신호 처리 칩이 개발되지 않아 실용화가 불가능했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베타 양자난수 발생기를 1.5㎜ 크기 칩으로 소형화해 실용화가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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