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나노 다음은? 양자!

나노기술의 꽃, 양자기술

사이언스타임즈는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정보과에서 제공하는 ‘S&T FOCUS’를 매주 2∼3회 게재한다. S&T FOCUS는 국내외 과학기술 관련 정책 및 연구개발 동향 분석결과를 제공하고, 다양한 과학담론을 이끌어 내어 과학문화 확산을 유도하기 위해 매월 3천부씩 발행되고 있다.

S&T FOCUS 2008년 1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열린 ‘신성장동력 창출 간담회’에서 “나노시대를 넘어 펨토시대를 열어달라”고 과학기술계 인사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나노 다음은 나노의 백만분의 일인 피코이고, 펨토는 피코의 천분의 일이고 나노의 백만분의 일이니, 두 단계를 뛰어넘는 과학기술혁명을 주문한 셈이다.

나노(nano)는 난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왔고, 10의 9제곱(1 다음에 0이 9개 붙은 십억) 분의 1을 뜻한다. 나노는 ‘나노’라는 단어 그 자체와, ‘난장이’라는 어원, 영어 ‘나인(9)’의 의미 등을 갖고 있지만, 음이 비슷해 잊어버리기 어려운 단어다.

나노미터는 십억분의 1미터로서 원자 한두 개의 크기에 해당하는 길이이다. 그러니 나노를 다루는 기술은 첨단기술의 한계에 해당하는 셈이다. 피코(pico)는 조그만 피리인 ‘피콜로처럼 작다’는 의미이고, 펨토(femto, 10의 15제곱 분의 1)는 ‘15(fifteen)’를 뜻하는 덴마크 말에서 왔다. 레이저기술에서는 펨토기술의 시대가 열리고 있으나 전자기술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무어 법칙의 한계에 대한 도전

1947년 전자회로의 스위치로 진공관을 대체하는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이후 전자기술은 소형화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인텔의 공동창업자인 헨리무어는 2년에 2배씩 반도체칩의 집적도가 증가한다고 했는데, 지난 60년 동안 그 예언이 맞아떨어져 ‘무어의 법칙’으로 알려지게 됐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파인만 교수는 1950년대 말 ‘밑바닥에는 작게 만들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말로 나노기술 시대를 예언했다. 그러나 이렇게 점점 더 작게 만드는 것이 언제까지나 가능할까?

2007년 말 트랜지스터 발명 6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스>는 이런 소형화 추세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헨리무어의 말을 인용하며, 인텔과 같은 세계적인 전자산업체가 무어의 법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양자컴퓨터나 광스위치와 같은 새로운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랜지스터의 크기가 원자 하나의 크기에 근접할수록 양자물리학적 현상이 두드러져서, 트랜지스터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0과 1이 분명해야 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0과 1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불확정성 원리의 양자 세계로 넘어가는데, 크기만 작게 만든다고 디지털과 같은 방식으로 전자회로가 작동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나노기술의 꽃, 양자기술

다행히도 양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연구해오던 양자컴퓨터가 나노의 한계를 뛰어넘을 기술로 등장하고 있다. ‘점점 더 작게’를 추구해 온 것이 나노기술이었다면 ‘작은 것을 양자원리로 어떻게 잘 다스릴까’를 연구하는 것이 양자기술이고, ‘나노기술의 꽃’으로 불리고 있다.

나노기술은 0과 1이 모호해지는 것을 두려워서 피하려는 반면, 양자기술은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0과 1을 동시에 처리하는 방식을 택한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집적도가 커져서 트랜지스터의 갯수가 많아지는 양적인 발전이 아니라, 디지털에서 양자로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넘어간 것보다 더 큰 과학기술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 양자컴퓨터는 어떤 식으로 디지털컴퓨터의 속도와 성능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디지털컴퓨터가 정보를 0과 1의 비트(bit) 단위로 처리하는 데 비해, 양자컴퓨터는 0과 1뿐 아니라, 0과 1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양자비트(quantum bit) 또는 큐비트(qubit)를 사용한다.

디지털컴퓨터의 비트가 1개이면 0 또는 1을 나타내고, 비트가 4개이면 0000, 0001, 0010, 0011, 0100, …, 1110, 1111 등 16가지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컴퓨터는 이 16가지를 한 번에 하나씩 열여섯 번에 나눠서 처리할 수 있을 뿐이다.

요즘 병렬컴퓨터 기법을 사용해 디지털컴퓨터 2대를 쓰면 2배, 4대를 사용하면 4배 정도 빨라질 수 있지만, 이것도 컴퓨터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한 경우에만 그 정도로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양자컴퓨터는 큐비트가 4개이면 0000부터 1111까지 16가지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디지털컴퓨터의 컴퓨터 대수가 늘어남에 따라 처리속도나 용량이 기껏해야 컴퓨터 대수만큼 증가할 수 있으나, 양자컴퓨터는 큐비트의 개수가 늘어남에 따라 처리속도나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셈이다.

양자정보의 세계를 여는 양자물리학

1994년 미국 벨연구소의 피터 쇼어는 양자컴퓨터로 자연수를 두 수의 곱으로 소인수분해하는 양자알고리듬을 발명했는데, 디지털컴퓨터로는 우주가 생긴 이후 우주가 사라질 때까지 계산해도 해낼 수 없는 큰 자연수의 소인수분해를 양자컴퓨터로는 불과 몇 분 내지 몇 시간 내에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큰 자연수의 소인수분해 문제는 인터넷이나 금융, 국방 등에 널리 쓰이는 암호통신에 활용되고 있다. 소인수분해는 숫자가 클수록 어렵기 때문에 큰 수를 사용한 암호일수록 풀기가 어려워지는데, 이제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면 이 암호는 모두 풀리게 되어 큰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양자컴퓨터의 등장이 디지털통신 보안에 큰 위협이 되는 한편, 양자물리학은 어떤 컴퓨터로도 해킹할 수 없는 완벽한 보안의 양자암호기술을 제공한다. 1984년 IBM의 찰스베넷과 몬트리올대학교의 브라사드는 양자물리학의 원리를 이용한 새로운 암호통신기술을 발명했다.

물질이나 빛의 양자물리학적인 상태는 아주 살짝만 건드려도 변한다는 성질을 이용해, 도청이 절대 불가능한 암호기술을 만든 것이다. 1993년 찰스베넷 등은 ‘양자 텔레포테이션’이라는 공상과학 같은 순간이동 기술을 발명했는데, 양자컴퓨터, 양자암호 등과 함께 21세기 최고의 기술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사실 양자물리학이 일으키는 과학기술혁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00년 막스플랑크가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별 분포를 양자물리학적인 가설로 설명했고, 1905년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양자물리학으로 설명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이후 양자물리학은 뉴턴의 운동법칙을 제치고 물질 세계의 근본원리로 등장하여 반도체와 레이저 등 20세기 정보통신기술을 담을 그릇 ‘하드웨어’를 제공했다.

여기까지를 양자물리학의 1차 혁명이라고 한다면, 양자컴퓨터를 포함한 양자기술은 양자물리학의 2차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 양자물리학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비트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소프트웨어와 운영체제(OS)까지 큐비트를 기반으로 하는 양자정보의 세계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4108)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